용인 서봉사지 건물터, 철제무기류 발굴
< 용인 서봉사지서 건물터 10여동·철제무기류 발굴 > (연합, 14. 11. 24.)
그런데 절터에서 무기류는 왜 나왔을까?
고려시대 사찰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하다. 고려시대의 승려들은 고고하게 수도하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귀족 자제들도 출가하는 자가 많았고, 때로는 처첩을 거느리는 자들도 있었다.
술을 먹고 떠들썩하게 처신하는 자들도 있었고. 이것은 요즘도 마찬가지인가?
그리고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무기를 들고 변란을 꾀한 세력의 중추도 사찰의 승려들이었다.
고려시대 사찰에는 무기를 다루는 승려들이 다수 있었다. 무뢰한처럼 몰려다니는 이런 세력들은 가끔 『고려사』에서 '수원승도(隨院僧徒)'라고 불리기도 했다.
참, 그리고 통일신라 시대에도 사찰에 무장한 승려와 민간인이 있었다. 초적이 휩쓸고 다니던 신라 말의 상황에서. 합천 해인사는 초적의 습격을 맞아 전사한 승려와 민간인이 50여 명이나 되었다. 혼란이 잦아들 무렵, 이들을 위로하는 행사를 치르고, 최치원을 비롯한 해인사 승려들이 벽돌판에 글을 새겨 묘길상탑에 넣은 것이 1960년대의 도굴꾼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는 한국역사연구회, 2003 「압수한 벽돌판과 사라져버린 토지문서」『고대로부터의 통신』(푸른역사) 참조.
그런데 발굴 결과, 이 절터는 주로 조선시대 건물지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무기들은 고려시대의 사회 분위기와 연결지어 생각하기 어렵다. 조선시대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의 승병 활동이 가장 큰 시기는 임진왜란 전후한 시기였다. 발굴단에 따르면 많은 절 건물이 임진왜란 때 불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으니, 여기서 출토된 무기들도 임진왜란 전후의 승병과 관련하여 해석하는 것이 무난할 듯하다.
아래 기사는 이런 맥락에서 참고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용인 서봉사지 파손 왜적 소행 가능성 커 > (뉴시스, 14. 1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