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남 해남 북일면 방산리의 장고봉 고분이 발굴된 모양이다.
이 고분은 이미 도굴된 것이고, 따라서 유물보다는 고분의 구조, 그리고 제사 흔적을 확인하는 등의 성과가 있는 듯.
그런데 고분의 외형이 일본열도에서 보이는 전방후원분에 가깝고, 내부구조도 왜국에서 조성되던 것과 같다고 해서 화제가 되는 모양이다.
< 한반도서 가장 큰 고대 무덤, 열자마자 덮은 까닭은… > (한겨레, 21. 3. 18)
무덤의 위치는 아래와 같다.
조금 더 다가가서 보면,
난감해서 다시 덮었다는 식의 기사는 노형석 기자의 주관적 판단인 듯하고.
유물은 별로 없는 고분을 발굴하여 외형과 내부구조 등을 확인하고 실측, 촬영 등등을 마무리하면, 기사의 사진에서 보듯이 무너질 것을 대비하여 철봉으로 지지한 것처럼. 안전을 위해서도 다시 흙을 덮는 것이 상식이다. 위험한 곳을 일반에게 마구 공개하고(준비 안된 상태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왜인 중에서 상당한 지위를 누린 자가 한반도 남단 끝에 묻힌 것이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다고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한반도 계통의 고분도 일본 열도에 여럿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해서 고대 한반도인이 일본열도 일부를 지배했다고 하면 억지스럽다. 인문의 이동, 조금 더 나아가면 정치사회적 배경 속에서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로 이주해간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래서 이 고분을 놓고 굳이 민족정서를 안고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중있는 왜인이 한반도에 와서 백제든, 가야든 함께 활동하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묻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무덤의 위치를 보면, 내륙 깊숙하게 자리잡고 대대로 세력을 떨치던 지배자의 무덤이 아니다. 한겨레 기사에도 나왔듯이, 이 고분은 주변에서 툭 튀어나온 듯이 단독으로 존재한다.
고분의 위치는 일본열도와 왕래하기 편한 곳이다.
고분이 있는 위치는 해변에서 직선거리로 약 2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러나 간척사업으로 해안선이 멀리 나가기 전이라면, 고분은 바다에서 채 1km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고향을 바라보는 가장 가까운 자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아래는 국토정보지리원에서 확인한, 1969년의 항공지도를 보고, 당시 해안선을 표시한 것이다.
삼국시대라고 가정하고 상상한다면, 당시의 해안선은 이보다 더 북쪽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장고형 고분은 해남 뿐 아니라 전남 일대에 제법 많이 분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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