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역사가 고고발굴을 통해 뒤집히거나 수정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신라와 백제가 대치할 때, 신라의 영역은 오늘날 경상도에 한정되고, 오늘날 전라도 지역은 의연히 백제 영토였다고 막연히 생각한 것이 30여 년 전까지의 이해였다.
전북 남원 아영면의 아막성 부근에서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교전을 하고. 이 때 일찍이 원광법사에게 '세속오계'를 받았던 귀산, 추항이라는 신라의 두 청년이 전사했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전북 지역 일부를 신라가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적극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신라는 642년에 백제의 공격으로 대야성(경남 합천)이 함락되고,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몰살당하는 위기를 맞은 적도 있다. 그래서 백제-신라의 공방전이 치열했던 상황만 부각되고, 신라가 전북 지역 일부를 유의미한 수준으로 영역지배했다는 이해를 얻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전북 지역과 가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1980년대까지, 가야사 이해는 대충 이랬다.
초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존속하다가, 후기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주도권을 쥐고 활동했다. 그러다가 신라가 낙동강 하구를 장악하자, 대가야는 일본열도와 교섭하기 위한 루트로 섬진강 수계로 진출하여 교통로를 확보했다.
이 정도 이해가 대체적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후에 전북 장수와 남원 등의 고분이 발굴되면서,
이 지역 고분에 가야 토기 등이 다수 발견되기 시작했다. 주로 대가야 계통의 토기였지만, 다른 지역 문화 요소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백제 계통으로 보이는 유물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학계는 일본서기에 보이는 가야 계통의 소국(小國) 가운데 반파국이 전북 장수, 기문국이 전북 남원이 아닐까...추정하는 의견들이 많아졌다. 매우 단편적이지만 일본서기 기록과 고고자료를 종합하여 판단한 결과였다.
그러나 여전히 서로 다른 의견이 더러 있다고 해야 정확하다.
오늘 한국일보에 고고학자가 쉽게 풀어쓴 이야기가 실려 참고된다.
< 전북 남원 운봉고원의 가야고분들 > (한국일보, 22.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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