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할 때는 가보지 못하여, 경주로 옮긴 특별전을 찾았다.
2011년 1월 11일.
서울보다는 많은 토기와 유물들이 전시실로 나왔다. 대부분의 유물이 경주박물관에 있으므로 당연한 일. 그래서, 서울 전시회보다는 경주박물관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토기만 해도 질과 양에서 어마어마하다.
왕의 관(棺) 내부. 발굴 당시의 유물 위치를 대략 복원해놓았다.
허리 쯤에 허리띠가 있고, 왼쪽 허리 부분에 큰칼이 놓여 있다. 그리고 저 끝 머리 쪽에는 금동관의 파편들이 보인다. 실제로는 이 금동관이 이마 위에 씌여진 채로 매장된 것이 아니고, 위치상 그보다 좀 아래를 덮은 모습이었으리라 추정한다.
그래서 머리에 쓰는 관(冠)이 아니라 일종의 데드마스크라는 견해도 나왔다. 그러나, 부장품은 현실 생활의 반영일 수밖에 없고, 무덤 속 어디에 묻혔든간에, 살아서 쓰던 관의 모습과 아주 다른 것을 만들어넣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 사진은 남분인 왕의 목관에서 발굴된 유물의 배치 상태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중간 부분에 허리띠가 있고, 허리띠 드리개가 있으며, 또 여러 개의 작은 칼을 붙여 장식한 큰 칼이 있다. 허리에 찬 위치이다.
그리고 위쪽에는 금동관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금동관의 양 옆으로 늘어뜨린 장식물이 두 개 나란히 놓여 있다. 가운데 둥근 줄은 목걸이일 것이다.
이런 배치는 시신이 놓인 위치 그대로이다.
여기서 내가 의문으로 느끼는 것은, 제일 아래쪽에 있는 귀걸이 2쌍이다. 삼국시대에는 남자도 귀걸이를 했으므로 귀걸이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데. 문제는 귀걸이가 출토된 위치이다. 머리쪽에 있어야 할 귀걸이가 왜 무릎 아래 쪽에 있을까? 그것도 2쌍이 있을까?
혹시 왕의 시신이 장착한 장신구와 무관한, 다른 사람의 것일까? 그렇다면 이 귀걸이의 주인공은 순장당하여 왕의 발치에 던져진 2사람의 것일까?
보고서를 한 번 더 꼼꼼히 읽어보아야 하겠다.
무덤 속에서 나온 많은 큰 칼들은, 칼집에 작은 칼들을 여럿 붙인 것들이 많다.
많은 수의 칼이 나왔는데, 아래는 그 중 조금 작은 것들이고, 또 오른쪽 상단의 꼬챙이같은 것들은, 큰칼의 칼집에 붙어 있는 (또는 독립된 유물일 수도 있을 듯) 아주 가늘고 긴 칼들이다. 실용품이라기보다는 장식성이 강하다.
* 싸이 블로그의 내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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