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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소식/고대

나주 정촌고분의 금동신발

 

  < 용 신발 신고 저승 세계로 날아간 백제인 > (연합뉴스, 14. 10. 23.)

 

  이한상 교수의 인터뷰 내용은 반은 맞고 반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과거에 이 교수가 금관이 실용품이 아니라 장례용으로 제작된 것이었음을 밝혔을 때와 마찬가지이다.

 

  특히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이런 발언을 접하면 오해할 소지가 다분하다.

  이 신발이 장례용품으로 만들어 무덤에 껴묻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전혀 없는 디자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신지 않는. 즉 손에 끼는 용도에 맞는 모양으로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일상에서 보고 익숙한 디자인을 전제로, 죽은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인 만큼, 실용성을 떨어뜨리는 복잡한 장식과 얇은 두께를 가지게끔 제작되었을 것이다.

 

  아래 기사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상세하다.

 

  < 누가 신었을까? 백제 금동신발 출토 '금방 벗은듯' > (한국일보, 14. 10. 23.)

 

  아래 기사는 정촌 고분의 내부구조 사진이 실린 것. 14년 12월 16일에 일반인에게 고분을 잠깐 공개한다는 기사.

 

  < 금동신발 출토 나주 정촌고분 일반 공개 > (연합, 14. 12. 15.)

 

 


아래는 문화재청의 보도자료임(14. 10. 23.) - 첨부파일은 문화재청에서 배포한 사진 자료임

 

141023 정촌고분 금동신발(붙임).pdf

 

- 영산강 유역 최대 규모 돌방무덤에서 완벽한 백제 금동신발 출토 -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상준)는 나주 복암리 고분군(羅州 伏岩里 古墳群, 사적 제404호)과 인접한 정촌 고분(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13호)에 관한 발굴조사를 시행하여, 완벽한 형태의 백제계 금동 신발을 비롯한 다수의 유물을 확인하였다.

정촌 고분 발굴조사는 삼국 시대 복암리 일대 마한 세력의 대외관계와 세력 동향 등을 파악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하고 있다. 2013년 조사에서는 고분의 규모와 다양한 매장시설(돌방, 돌덧널, 옹관) 9기가 확인되었다. 올해는 고분 안에 만들어진 3기의 돌방무덤에 대한 내부 조사를 시행하여, 금동 신발, 금제 귀걸이, 금제 장신구, 마구, 화살통 장식, 화살촉, 옥, 토기, 석침(石枕), 개배(蓋杯, 뚜껑 접시) 등의 중요 유물이 확인되었다.

※ 돌방무덤: 석재를 쌓아서 만든 무덤
※ 돌덧널무덤: 지하에 깊이 움을 파고 부정형 할석 또는 덩이돌로 직사각형의 덧널을 짠 무덤
※ 옹관묘: 독무덤이라고도 하며, 크고 작은 항아리 또는 항아리 두 개를 맞붙여서 관으로 쓰는 무덤
※ 석침: 네모난 돌의 가운데를 죽은 이의 머리에 맞게 움푹 파이게 만들어 머리를 고정한 돌배게

▪ 마한․백제 지역 최대 규모 돌방무덤 확인
금동 신발이 출토된 1호 돌방무덤은 최대 길이 485㎝, 너비 360㎝, 높이 310㎝로, 현재까지 알려진 마한․백제권의 초기 대형 돌방무덤 가운데 가장 크다. 내부 구조는 돌방 바닥 부분에서 천장 쪽으로 올라갈수록 좁아 들게 축조하고, 출입구에는 석재 문틀을 만들었다.



▪ 연꽃과 도깨비 문양이 새겨진 완벽한 형태의 금동 신발 출토
금동 신발의 크기는 길이 32㎝, 높이 9㎝, 너비 9.5㎝로, 발등 부분에는 용 모양의 장식이 있고 발목 부분에는 금동판으로 된 덮개가 부착되어 있다. 특히, 신발 바닥에는 연꽃과 도깨비 문양을 투조(透彫)와 선각(線刻)으로 꾸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 투조(透彫): 금속, 목재 따위의 재료를 도려내어서 모양을 나타내는 조각 기법
※ 선각(線刻): 선처럼 파서 새긴 그림이나 무늬

그동안 금동 신발은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고창 봉덕리, 공주 수촌리, 고흥 안동 고분 등에서 발견되었으나, 부분적으로 훼손되거나 일부 장식이 손상된 채 수습되었다. 그러나 정촌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 신발은 용 모양 장식과 발목 덮개, 연꽃과 도깨비 문양 등의 장식이 완벽한 상태로 출토되었다. 특히, 신발 바닥 중앙에 장식된 연꽃 문양은 8개의 꽃잎을 삼중으로 배치하였고, 중앙에 꽃술을 새겼다. 도깨비 문양은 부릅뜬 눈과 크게 벌린 입, 형상화된 몸체 등이 연꽃 문양을 중심에 두고 앞뒤로 2개가 묘사되어 있다.

한편, 금동 신발은 백제와 관련이 깊은 유물로, 백제가 영산강 유역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시점과 토착세력과의 관계 등 당시의 복잡한 정치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
※ 금동 신발의 의미: 백제의 지방 지배와 관련된 사여품(하사품)으로 보는 견해가 있음

▪ 백제, 가야, 신라와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마구, 칼, 장신구도 출토
금동 신발 이외에도 마구와 고리칼, 금제 장신구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유물은 남원 두락리, 월산리의 가야계 석곽을 비롯하여 경주의 황남대총 등에서 확인된 바 있어, 무덤의 주인공은 백제뿐만 아니라 가야, 신라와도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앞으로 돌방무덤의 구조와 축조 방법 등을 파악하기 위한 추가 발굴조사를 시행할 예정이다. 추가 발굴조사를 통해 유물 수습을 완료하고, 올해 11월 말에 최종 발굴 성과를 발표함과 동시에 현장을 방문하는 국민을 대상으로 공개 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한편,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의 상호 연관성 등을 검토하여 국가지정문화재 확대 지정 등 최적의 보존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 복암리 고분군: 1996년부터 5회에 걸쳐 발굴되었으며, 금동 신발, 은제 관식, 고리칼 등 1,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영산강 고대 문화의 보물창고로 평가됨

 

돌방무덤 출토 금동신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