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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소식/고대

밀양 봉성사지 발견

  발굴소식은 늘 흥미롭고 새롭다.

  울산 - 밀양간 고속도로 공사구간에서 봉성사지가 확인되었다.

 

<연합뉴스에 실린 현장>

 

  < 고속도 공사구간서 삼국유사 '봉성사지' 발견 > (연합, 15. 8. 3.)

 

  아래 경향신문의 기사가 위치 사진까지 조금 더 자세하다.

  < 밀양-울산고속도로 공사구간서 삼국유사 ‘봉성사지’ 발견 > (경향, 15. 8. 3.)

 

 

  이번에 확인된 곳은 밀양 봉성사이다. 이곳은 『삼국유사』 보양이목(寶壤梨木)조에 나오는 절이다. 이곳에는 보양이라는 승려가 머물고 있었는데, 그는 고려 태조를 도운 것으로 나온다. 해당 구절은 아래와 같다.

 

  일찍이 법사가 당에 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추화군(推火郡:밀양)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다. 마침 태조가 동쪽을 경략하여 청도(淸道)의 경계에 이르자 산적이 견성(犬城)[산봉우리가 물가에 가파르게 솟아 있다. 지금 세상에서 그 이름을 싫어하여 견성(犬城)으로 고쳤다]에 모여 있었는데 교만하여 치지 못하였다.
  태조가 산 아래에 이르러 법사에게 쉽게 제압하는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대답하였다. “무릇 개의 성질은 밤을 맡고 낮은 맡지 않으며 앞을 지키며 뒤를 잊으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쳐야 합니다.” 태조가 그를 따르니 과연 패하여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 신통한 지략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가까운 현(縣)의 조(租) 50석을 지급하여 향화(香火)를 에 보탰다.
  그래서 절에서 이성(二聖)의 진용(眞容)을 안치하였고, 이때문에 봉성사(奉聖寺)라 이름하였다. 후에 (보양은) 작갑(鵲岬)으로 옮겨가서 절을 크게 짓고 죽었다. (『삼국유사』권제4 義解 제5, 寶壤梨木)

 

  이렇게 문헌에 나오는 곳이 발굴을 통하여 확인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라 매우 반갑다.

 

  다만 기록에는 봉성사라는 절이 2개 있다. 이번에 확인된 봉성사는 보양이라는 승려와 고려 태조의 초상을 모셔서 봉성(奉聖寺)라는 이름을 얻은 경우이고.

  신라 전성기 때 창건된 경주의 봉성사도 있다. 일반적으로 경주의 봉성사가 더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왕경의 봉성사는 신문왕 5년(685) 3월에 혜통(惠通)이 주도하여 완공된 절로, 혜통은 신인종(神印宗) 게통의 승려였다. 봉성사는 왕실이 직접 관리하는 사찰에 두어지는 성전(成典)이 설치된 사찰이었다. 『삼국유사』신충괘관(信忠掛冠)조의 내용을 참고하면, 이 절은 경덕왕대에 신충에 의해 중창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봉성사성전은 경덕왕이 수영봉성사사원(修營奉聖寺使院)으로 고쳤으나, 뒤에 다시 옛 이름으로 되돌렸다.

 

  왕경의 봉성사는 위치가 모호했으나, 2002년에 우연히 유골함의 두껑으로 보이는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대략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경주 월성동 주민센터 앞의 가로수를 뽑아낸 자리에서 신라문화진흥원의 전문위원 박정호가 유물을 발견했는데, 납석제(臘石製) 두껑의 파편에는 "永泰二年奉聖寺北方"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영태 2년은 766년(혜공왕 2)에 해당한다.

  납석제 두껑을 소개한 언론기사.

 

  < 신라 봉성사 명문 발견…봉성사 위치 추정 소중한 사료 > 동아, 2003. 2. 25.0

 

  지금 경주에 사는 분들이 이 명문을 바탕으로 봉성사의 위치가 월성동 주민센터이리라 추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조금 수정될 필요가 있다. 즉 만약 이 유골함 두껑이 파괴된 통일신라 무덤에서 나온 것이라면, 여기 적힌 명문은 봉성사라는 절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유골함을 묻은 위치, 매장지의 위치를 알려주는 내용인 것이다.

  그렇다면 왕경의 봉성사는 월성동 주민센터에서 남쪽으로 좀 떨어진 곳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만, 이렇게 보더라도 왕경 봉성사의 위치가 깔끔히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월성동주민센터는 지금의 첨성대에서 1시 방향으로 약 200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Daum지도에서 보면 이렇다.

 

  통일신라 무덤들은 대개 지금의 경주 구시가지 외곽으로 나가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영태2년명 유골함 두껑이 발견된 곳이 원래 무덤이 만들어진 곳이라면, 신라 왕경 주거지 한 복판에 해당한다.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긴 하지만, 통일신라기에 이 지점에도 무덤이 만들어졌을까... 비록 화장한 다음에 유골함을 안치하는 방식일지라도...

  혹은 명문의 글자 순서로 보면, "영태 2년에... ...의 北方에 있는 봉성사에 모셨다"는 문장이 될 수도 있으므로. 이 유골함이 봉성사에 안치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바로 이곳이 봉성사가 맞는 셈이다.

 

  이런 점을 여러 모로 따져보아야 할 듯. 이래서 고대사와 고고학은 참 많은 변수를 가지는 분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