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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곽/고대

청주 정북동 토성

  2018년 4월 17일 오전. 몇년만에 청주 정북동토성을 다시 찾다.

  봄이 한창일 때라서, 잔디의 색깔이 아직 완전히 파랗게 바뀌지는 않고 누런 색과 반반 섞여 있는 상태. 다만, 정오 가까운 무렵이라서 토성 성벽의 입체감이 사진에 드러나는데는 좀 아쉬운 시간이었음.

 

 

  아래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가져온 것으로, 아마 1980년대말이나 90년대쯤 될 듯. 내가 처음 이곳을 찾았던 2000년대 초에는 민가가 대부분 철거되고 두세 가구만 남은 상태였다.

 

<민가가 있던 시기의 정북동 토성>(문화재청)

 

  정북동토성은 청주 외곽, 북쪽으로 미호천이 흐르는 남쪽에 있다. 강의 흐름, 자연제방과 평행으로 성벽을 쌓은 것이 아니고, 정사각형에 가까운 토성을 남북 방향에 맞추어 쌓았다. 그래서 나는 일찍이 이 성이 낙랑, 대방 등의 중국 군현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상상한 적이 있다.

  성벽의 규모는 동벽 185.5m, 서벽 165m, 남벽 155m, 북벽 170m 정도이다. 잘 남은 곳의 성벽 높이는 약 3m안팎으로 보인다. 아마 성곽이 사용되고 있던 시기에는 4m 정도를 넘는 높이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위 사진에서 성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 곳이 동벽이다.

 

 

  지금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민가를 들어내고 깔끔하게 정비해놓았다. 그동안 몇 차례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졌다. 동문을 들어서면 다음과 같은 안내판이 있다.

 

 

 

  이 안내판에는 모두 5차례 조사와 발굴이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2017년에 이루어진 것까지 합치면 6차례인 듯.

  안내판이 있는 동문 쪽에서 남쪽 성벽 모서리를 바라보면 이렇다.

 

  조금 더 다가가서 보면, 발굴을 통해 드러난 성벽 바깥의 해자(잡풀 더미가 있는 구덩이)가 확인된다.

 

  토성 전체의 설명문이다.

 

 

  본격적 조사를 하기 전에는 어느 시기에 쌓은 것인지 애매했다. 후삼국시대 호족이 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도 있었다. 그러나 성 안에서 돌화살촉 등이 발견되면서 청동기시대까지 소급될 가능성도 생겼다.

  본격적 발굴이 시작되면서, 특히 최근의 발굴을 통해 삼국시대의 흔적이 뚜렷하게 확인되었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서 해자가 내버려진 상태가 되었고, 그 토층에서 고구려 토기가 발견되기도 했던 것이다. (고구려토기는 위에 링크한 MBC 보도에 나옴)

  그래서 삼국시대에 실제로 사용되던 성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성벽 밖의 구덩이에서 고구려토기가 나왔다고 해서, 이 성이 고구려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발굴에서 백제 토기도 나왔고, 그보다 좀 이른 시기의 토기편들도 나왔다. 따라서 더 많은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섣부른 판단을 삼가야 한다.

  아무튼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이 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고대사회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어쩌면 삼한 소국들, 그리고 여러 읍락(邑落)들의 우두머리가 있던 지역사회 중심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도 나온다.

 

 

  작년 청주 MBC에서는 발굴 소식을 전하는 뉴스도 한 모양. 동영상이 참고됨. 여기에 이런 언급들이 나온다.

 

  < 청주 정북동토성, "고대사회 정치 거점" > (청주MBC, 17. 6. 19)

 

  동쪽 성벽 끝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위 사진에 보이는 사람은 우리가 성벽을 둘러볼 때 드론날리던 사람. 시험비행 끝내고 나가는 모양. 이 사람이 나가는 곳이 동문이다. 멀찌감치 차를 대고 토성으로 접근하면, 이 문으로 성 안에 들어가게 된다.

 

  아래는 동문터 안내문.

 

  동쪽 성벽 위에서 성안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북쪽 성벽 밖으로 나와서 북문지를 찍은 것.

 

 

  어쩌면 삼국 초기부터 사용된 네모꼴 토성인데, 삼국간의 전쟁이 치열해지던 시기가 되면 방어 용도로는 효율성이 떨어지고, 산성이 주된 군사시설로 이용되면서 조금씩 관심이 옅어졌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다가 후대로 갈수록 버려진 상태가 되고, 더 시간이 지나면 농민들이 안에 들어가서 집을 짓고, 밭을 일구며 자리잡았고.

  그러면서도 주변의 평지 농토가 있기 때문에 굳이 성벽을 허물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 성벽은 고스란히 남게 되고. 특히 작은 마을을 둘러싼 담장 역할을 하게 되니 자연스레 보존이 되고... 이렇게 하여 오늘날까지 운좋게 남은 토성이 되지 않았을까?

 

  수년 전 6월 말에 가서 찍은 사진도 있는데, 그 때는 풀이 새파랗게 아주 진한 것이라. 이번 사진으로만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