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일.
오랜만의 망중한(忙中閑)을 억지로 만들어냈다고 할까... 야간운전으로 경주를 찾았다.
다음날 아침에 느즈막히 일어나 제일 먼저 찾은 곳은 10여 년 전에 가보고 다시 찾지 못했던 천룡사지. 옛 기억으로도 산길을 제법 걸어올라갔던, 쉽지 않은 길이었는데.
조금 무리하게 와룡사 앞까지 차를 몰고 갔다.(다음부터는 이런 무리는 안하는 것이 나을 듯. 이미 등산객들의 차가 서너대 주차공간을 다 차지하고 있었음).
와룡사에서 천룡사까지는 잠깐씩 두어번 쉬면서 약 20분 가량 걸었다.
천룡사가 있는 틈수골 꼭대기에는 제법 평지가 있어서 농사짓는 민가들이 몇 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다시 찾은 길에는 대부분의 밭들이 버려진 상태로 수풀만 수북했다.
두군데 식당만 등산객들을 상대로 성업중이었다. 마침 토요일이라, 무리지어 등산하는 사람들이 다들 식당에서 막걸리도 마시고 전도 먹고... 나도 시원하게 한 잔 하고 싶었지만 운전 때문에 포기.
탑 있는 곳을 찾으니, 예전에는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탑 옆에 모아두었다.
멀리 고위산(高位山)을 배경으로 천룡사지의 석탑은 이렇게 서 있다. 원래는 파손이 많았던 것이나, 1990년에 동국대에서 발굴한 뒤에 상륜부를 포함한 석재 일부를 보충하여 복원한 것이다.
동국대 발굴 때는 여러 개의 금동소불(小佛)과, 감실 석불을 여럿 새겨넣어서 마치 골굴사의 미니어쳐를 연상케 하는 돌도 발견되었었다.
감나무 뒷편에 보이는 움막같은 집도 명색이 절이다. 비닐하우스에다 '임시법당'이라는 이름판도 붙여 놓았다. 천룡사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절은 이보다 조금 뒷편에 있는데, 이 날은 거기까지 가지 않았다.
예전에 몇 채의 민가가 있다가 철거된 곳에는 군데군데 감나무와 느티나무들이 서 있다.
1996년~7년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부근을 발굴하여 여러 군데 건물지를 확인했었다. 이렇게 수습된 석물들을 한 곳에 모은 것도 그 때 발굴이 끝난 뒤인 듯.
천룡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제법 상세하다. 문무왕 때 신라를 찾은 당나라 사신 악붕귀(樂鵬龜)가 "이 절을 없애면 곧 나라가 망할 것(破此寺則國亡無日矣)"이라고 했다는 말도 소개해놓았다.
그리고 이 말이 사실이기라도 한 듯, 신라 말에 절이 파괴된 지 오래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최승로의 손자 최제안(崔齊顔)이 천룡사를 중창하고 신서(信書)와 원문(願文)을 남겨 두었다는 이야기도 적었다.
일연은 천룡사에 남은 신서(信書)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경주에 머물 때 천룡사를 찾아서 직접 확인하고 옮겨적은 내용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그 뒤에 언제인가... 절은 폐사(廢寺)로 변한 듯하다.
이전에는 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석조도 탑 앞에 이렇게 옮겨 놓았다.
농민이 경운기에 매다는 쟁기를 석조에 기대놓았고...
탑 바로 앞의 조립식 주택에는 스님이 계시는 듯. 그 앞뜰에는 귀부 하나를 수습해서 놓아두었다. 일반적인 비석을 올려두는 모양과 달리, 둥근 돌기둥을 꽂게끔 되어 있다. 아마 8각이나 둥근 석당(石幢)을 꽂았던 흔적이 아닐까 한다.
경주박물관에 있는, 이차돈 순교 모습을 새긴 백률사 석당같은 종류가 아니었을까 상상. 굵기로만 보면, 이 귀부에 올려져 있던 석당이라면 백률사 것보다는 훨씬 가는 것이었을 듯.
천룡사지를 보고 내려와서, 구황동 모전석탑지를 들러고. 나원리 석탑도 10여 년만에 찾아보고... 해질녁은 아니었는데, 구름이 제법 껴서 나원리 석탑의 사진은 좀 시원찮게 만들어진 듯.
시내로 다시 들어와서, 얼마 전에 알게 된 경주 사는 분과 함께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오랜 친구처럼 담소하며 시간을 보냈다. 좋은 친구가 생긴 셈이라, 이제는 홀로 경주를 찾아도 심심하지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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