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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소식/고대

장수 삼고리 고분군, 가야 유물(1, 2차 발굴)

  전북 장수는 대가야 계통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고분이 많다.

  왜 이곳이 백제의 영향 하에 들어가지 않고 고령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 영향을 받고 있었을까?

 

  일찍부터 학계는 일본서기의 기록 등을 분석하면서, 낙동강 하류가 신라에 의해 막히면서 대가야가 해상 교역로를 확보하려고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런 해석은 지금도 유용하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교역로로 이어지는 루트를 이용한 것인가, 아니면 대가야가 섬진강 유역을 영토로 지배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대가야의 영향을 받는 현지 토착세력들이 존재했던 흔적인가... 등등은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이번(2018년)에 장수에서 다시 중요한 유물이 출토된 모양이다. 아직 문화재청 보도자료는 올라오지 않았고, 연합 기사만 나왔다.

 

<귀걸이 : 연합뉴스 사진>

 

  < 장수 삼고리 고분군서 가야 금제귀걸이·철제고리칼 출토 > (연합, 18. 9. 19)

 

 


  2019년 5월 24일. 삼고리 고분 2차 발굴성과가 공개된 모양이다.

 

 

  아래는 문화재청 보도자료.


- 금강 상류지역 중심으로 성장한 가야 토착세력 무덤 추정,

가야계‧백제계 유물 발견 -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의 허가를 받아 장수군(군수 장영수)과 (재)전주문화유산연구원(원장 유철)에서 지난 4월부터 조사하고 있는 장수 삼고리 고분군의 2차 발굴조사 결과, 다수의 가야토기와 철기류, 백제계 토기 장군 등이 발견되었다.
  * 장군(橫缶): 물이나 술, 간장 등 액체를 담는 데 쓰는 그릇 또는 오줌을 담아 나르는 그릇
  * 발굴현장: 전라북도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 산 76번지

 

  장수지역은 마한 시대 이래로 백제 문화권에 속했던 곳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1995년 장수 삼고리 고분군에서 가야인의 무덤이 발굴됨에 따라 금강 상류지역은 백제에 병합되기 이전까지 가야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처음으로 알린 바 있다. 1차 조사는 지난해 6월부터 10월까지 1~3호분을 대상으로 했고, 지난달부터 하고 있는 2차 조사는 1~3호분 서쪽 능선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는 8~10호분에 대한 것으로, 이달 말에 마무리된다.

 

  지난 1차 조사에서는 석곽묘(石槨墓, 돌덧널무덤) 12기와 토광묘(土壙墓, 널무덤) 13기를 발견하였으며, 이번 2차 조사에서는 8~10호분의 무덤군에서 수혈식 석곽묘(竪穴式 石槨墓, 구덩식 돌덧널무덤) 3기, 토광묘 1기가 조사되었다. 또한, 토기류와 철기류를 비롯하여 말갖춤 등 5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 말갖춤: 말을 부리는데 사용되는 도구

 

  주매장시설인 수혈식 석곽묘는 8~10호분에서 각각 1기씩 확인되었는데, 석곽은 강돌(川石)을 사용하여 축조하였고, 장축 방향은 능선의 경사면을 따라 두었다. 3기 중 석곽의 규모가 가장 큰 8호분에서는 물결무늬의 목 긴 항아리와 그릇받침 7묶음, 장군(橫缶), 다양한 종류의 철기류가 나왔다.

 

  장군은 종래 완주 상운리 고분군, 군산 산월리 고분군, 서울 몽촌토성 등 마한과 백제 시대의 무덤과 토성에서 주로 출토되었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수혈식 석곽묘 안에서 가야토기들과 함께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9호분에서는 뚜껑과 함께 여러 종류의 토기류, 은제고리 2점과 쇠도끼, 쇠화살촉을 비롯해 재갈과 교구 등의 말갖춤이 출토되었다. 10호분에서는 작은 항아리 1점과 철모(鐵矛) 1점이 나왔다.

 

  지금까지 조사내용을 보면 장수 삼고리 고분군은 금강 상류지역에 기반을 둔 가야 토착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다만, 부장유물 중 백제계·대가야계 양식의 토기류가 혼재되어 있어, 이 무덤을 축조한 가야세력은 5~6세기경에 주변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경제·문화사적 관계를 이루면서 성장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더 많은 사진을 볼 수 있는 첨부파일

0524 장수 삼고리 고분군 2차 발굴조사 성과 공개(붙임).pdf
다운로드

 

 

  그런데 이것을 갖고 장수 지역에 기반을 둔 토착 가야세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학문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나는 좀 회의적이다.

  5세기 후반이 되면 경남 창녕에서는 신라 토기와 장신구가 많이 나온다. 이걸 갖고 창녕 지역에 기반을 둔 신라세력이라고 하면 어색하다. 매우 어색하다. 당시 역사를 설명하는 학계의 일반적 상식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창녕에 신라의 정치 군사 문화적 영향력이 상당히 침투하고 있었다, 이미 신라의 영역으로 변화하였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바르기 때문이다.

 

  경향의 이기환 기자도 기사를 올렸다.

  < 금강 상류 지역에서 출현한 가야계 무덤의 정체 > (경향, 19. 5. 24)

 

  연합뉴스 기사도 있고.

  < 장수 삼고리 고분서 1천500년전 가야·백제 토기 출토 > (연합, 19.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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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진 발굴의 중간 결과

 

  < 장수군 삼고리 고분군서 삼국시대 토기·철기 70여 점 발굴 > (연합, 21.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