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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소식/고대

5~6세기 옛 압독국 지역 지배층 추정 고분 발굴

  이미 오래 전에 보도된 것이지만, 기록을 위해 담아둔다.

  아래는 17년 6월 23일 문화재청 보도자료.

 


5~6세기 신라 지방(옛 압독국 지역)의 지배층 추정 고분 발굴

- 금동관모, 은제허리띠, 귀걸이 등과 어린이 순장인골도 확인 -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의 허가를 받아 경산시(시장 최영조)와 (재)한빛문화재연구원(원장 김기봉)이 발굴조사 중인 경북 경산시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사적 516호) 내 ‘임당 1호분’ 발굴조사에서 매장 당시의 복식을 그대로 갖춘 옛 압독국 지역의 지배층 무덤이 확인되었다.
 * 압독국(押督國): 경산지역에 자리하고 있던 진‧변한(辰弁韓) 소국 중의 하나
 


  이 무덤에는 은제허리띠, 순금제의 가는 고리 귀걸이(細環耳飾) 등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금공품을 착용하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해 누운 주인공이 확인되었으며, 주인공 발치에서는 순장자로 추정되는 금제 귀걸이를 착용한 어린아이 인골 1점과 또 다른 인골 1구도 확인되었다.

 

  사적 제516호로 지정된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은 삼국 시대 신라의 지방 세력이 축조한 고총으로 구성된 고분군으로, 1982년 임당동의 고총과 1987년 조영동의 고총이 발굴되면서 문헌 기록에 단편적으로 나오는 압독국(押督國) 지역에서 세를 이루던 지배층 무덤임이 밝혀졌다. 지난해부터 임당 1호분에 대한 구조와 성격을 밝히고 정비복원을 목적으로 한 학술발굴조사가 시작되었으며, 이제 마무리 단계에 있다.

 

  임당동 구릉의 말단부에 자리한 임당 1호분은 5기 정도의 묘곽이 연이어 축조된 연접분으로 하나의 동산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분 정상부에 있는 당목으로 인해 전체 고분의 절반 정도만을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형의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로 구성된 소위 주부곽식(主副槨式)의 암광목곽묘(岩壙木槨墓) 2기(1A호/1B호)가 드러났다. 이 가운데 먼저 축조된 1A호는 다행히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아 매장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고분은 토기류 등의 유물양상으로 보아 5세기 말 또는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 연접분: 하나의 무덤을 축조한 다음 이어서 다른 무덤을 축조하여 봉분을 이어 나간 무덤.
  * 암광목곽묘(岩壙木槨墓): 암반을 파내어 무덤구덩이를 만든 후 시신과 유물을 부장하기 위한  나무덧널을 내부에 축조하고 봉분을 씌운 무덤형태

 

  1A호분은 둘레돌(호석, 護石) 장경 17.78m, 단경 15.36m, 잔존높이 3m의 타원형 봉분의 내부에 길이 430cm, 너비 216cm, 깊이 190m의 장방형 으뜸덧널과 길이 359cm, 너비 428cm, 깊이 77~118cm의 사각에 가까운 딸린덧널을 ‘昌(창)’자형으로 배열하였다. ‘昌’자형의 주부곽식 고분은 경산 임당지구 고총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형태이다.

 

  으뜸덧널에는 나무덧널(木槨)을 설치하였고, 무덤구덩이의 어깨 위에 5개의 큰 돌로 뚜껑을 만들었다. 딸린덧널은 길이 310cm, 너비 350cm, 높이 70~80cm의 나무덧널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으뜸덧널 바닥에서는 은제허리띠, 순금제의 가는 고리 귀걸이(細環耳飾), 금동관모(金銅冠帽)와 관장식(冠飾), 고리자루칼(環頭大刀) 등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금공품을 착용하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해 누운 주인공이 확인되었다. 또한, 주인공 발치에서도 금제 귀걸이를 착용한 어린아이 인골 1점이 확인되었는데, 순장자로 추정된다.

 

  주피장자가 착용하고 있는 복식인 금동제 관모와 관장식, 순금제 귀고리, 은제 허리띠, 은장식 고리자루큰칼 등은 이 고분의 주인공이 압독국(押督國) 또는 압량소국(押梁小國)의 지배세력인 간층(干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 가는고리 귀걸이를 착용한 점, 고리자루큰칼을 포함한 큰칼 3자루가 함께 부장된 점으로 보아 주인공의 성별은 남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간(干): 신라 마립간시기 지방 수장층을 부르는 칭호  

 

  딸린덧널에는 큰항아리(대호, 大壺), 짧은목항아리(단경호, 短頸壺), 긴목항아리(장경호, 長頸壺), 굽다리접시(고배, 高杯) 등의 다양한 토기류가 빈틈없이 가득 채워진 상태로 출토되었고, 금동제 말알장, 철제 발걸이 등의 말갖춤(馬具類)을 올려 부장하였다. 또 딸린덧널의 서쪽 묘광 가장자리에서는 따로 부장된 많은 제사용 토기류와 금동제귀고리를 착용한 순장자로 보이는 또 다른 인골 1구가 확인되었다.

 

  이번에 발굴된 임당 1A호분은 도굴되지 않고 고분 축조당시의 유물 부장상태 그대로 조사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양한 종류의 금공품과 토기자료, 어린이 순장인골 확인 등을 통해 삼국 시대 상장례와 순장풍속 등 고분문화와 지역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사진이 들어 있는 파일

0622 5~6세기 옛 압독국지배층 추정 고분 발굴.pdf

 

YTN 동영상1 (17. 6. 23.)

 

YTN 동영상2 (17. 6. 23.)

 

< 경산서 1500여년 전 압독국 최고 지배층 무덤 발굴 > (연합, 17. 6. 23.)

 

 

< 경산서 5, 6세기 압독國 지배층 무덤 발견 > (동아, 17. 6. 23.)

 

  그런데 나는 임당 유적이 정말 옛 압독국의 후예들, 혹은 압독국이 소멸한 뒤에 현지의 새로운 토착세력들이 신라 중앙 권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들 고분을 조성했는지... 조금 더 기다려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논문으로도 쓴 적이 있지만, 어쩌면 신라 6부인의 일부가 일찍부터 경산지역에 나가서 거주한 것 아닌가 하는 자료들이 있기 때문이다. 6두품으로 알려진 원효의 조상이 살던 곳이 경산이었고, 원효도 경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록을 따른다면, 원효는 경산에서 내어나 자랐고, 원효의 할아버지 사당도 경산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6두품에 해당하는 신분층 가운데 일부가 일찍부터 경산 쪽에 옮겨서 거주하다가, 나중에 6세기 초에 와서 아시촌(阿尸村) 소경이 설치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한다.

 

  지증왕대에 두어진 아시촌 소경은 설치된 이후에 흔적이 없다. 사라졌다는 기록도 없다. 어디인지도 모른다. 일찍이 임병태 선생이 경북 의성의 안계면으로 비정했지만, 그닥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