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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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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장수의 가야 연관 유적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역사가 고고발굴을 통해 뒤집히거나 수정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신라와 백제가 대치할 때, 신라의 영역은 오늘날 경상도에 한정되고, 오늘날 전라도 지역은 의연히 백제 영토였다고 막연히 생각한 것이 30여 년 전까지의 이해였다. 전북 남원 아영면의 아막성 부근에서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교전을 하고. 이 때 일찍이 원광법사에게 '세속오계'를 받았던 귀산, 추항이라는 신라의 두 청년이 전사했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전북 지역 일부를 신라가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적극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신라는 642년에 백제의 공격으로 대야성(경남 합천)이 함락되고,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몰살당하는 위기를 맞은 적도 있다. 그래서 백제-신라의 공방전이 치열했던 상황만 부각되고, 신라가 전..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과정 미륵사지 석탑 복원공사 이전의 모습(문화재청)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 작업이 후반기로 접어들고 있는 모양이다. 비교적 자세한 소개 기사가 올라와서 링크. (중앙, 17. 9. 11)
나주 철천리 석불입상과 마애칠불 2015년 10월 2일. 국립나주박물관의 작은 특별전을 둘러보고, 이번 기회에 한 번 둘러보자고 생각하던 나주 봉황면 철천리(鐵川里) 석불을 찾았다. 미륵사라는 작은 절 뒷산에 있는데. 이 절은 납골시설을 마련하여 운영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는 듯했다. 절 앞까지 차가 올라간다. 주차장에 차를 대면 보이는 절 입구. 절을 지나서 언덕 위로 올라가면 보이는 모습. 왼쪽의 보호 난간 속에 있는 것이 [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상]이다 보불 4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추꼴의 작은 바위를 돌아가며 불상을 새겼다. 얼핏 보아도 그리 우수한 조각수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윤곽을 부조(浮彫)로 파낸 뒤에, 불상의 몸 형체는 거의 선각(線刻)했다고 할 정도. 보물로 지정될 당시에는 조성시기를 대략 12~13세기 쯤으로 판..
광주서 천오백년전 대규모 마을유적 광주에서 대규모 마을 유적이 발굴된 모양이다. (연합, 15. 6. 9) 고상식(高床式) 건물은 주로 창고로 쓰이는 것인데. 이게 대량으로 확인된 것이 흥미로운 점. 그리고 일반 주거지 사이에 한두개씩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개인, 혹은 수장(首長)의 것일 수도 있고. 밀집해 있는 것은 집단의 저장시설일 수도 있을 듯. 자세한 것은 나중에 발굴보고서를 보아야 할 것.
익산 왕궁리 유적 2014년 10월 17일. 노랗게 색이 변한 나뭇잎들이 좀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몇 년만에 들런 왕궁리 유적. 이곳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오층석탑이다. 그러나 느티나무 등의 잎은 이미 다 떨어졌고, 잔디만 녹색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였다. 예전에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되며 어수선한 분위기일 때 와 본 것이 마지막이었던 듯. 이렇게 깔끔한 모습을 본 것은 거의 20년이 넘은 것같다. [새로 산 미러리스 시험하느라고 사진을 좀 크게 실었으니 클릭해서 보십사] 이곳 주변에서는 발굴을 통하여 많은 것들이 확인되었다. 전각, 대형화장실, 공방 터와 정원 등이 확인되었는데, 그 중 화장실 터에서 나온 토양을 분석하여 기생충 알을 확인하기도 했다. 기생충 알은 단순히 흥미거리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과 건강..
임실 진구사지 석등 크기도 크려니와, 조각양식이 신라말 선종이 유행할 때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그래서 2007년에 우연히 한 번 들른 뒤로, 근방을 지날 때면 늘 들렀다 오는 것이 보통이다. 예전에는 황량한 절터에 석등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몇 년 전에 발굴을 끝내고, 축대를 다시 쌓아두었다. 축대라고 해야, 소맷돌과 계단 일부만 원래의 석재들이 남아 있는 상태이고, 나머지 돌들은 새로 쌓은 것. 발굴을 끝내고 주변을 정비했고, 고증을 통해 '진구사지(珍丘寺址)'라는 이름을 붙여두었다. 화장실을 세워두었고 주차장도 만들어놓았다. 예전에는 '임실 용암리 석등'이라 하던 것을 '임실 진구사지 석등'으로 문화재 명칭도 바꾸었다. 아래는 화엄사에 갔다오다가 여름에 들렀을 때 사진. 이런 모양으로 생긴 석등..
보림사, 실상사의 철불 부근을 지날 길이면 반드시 들러는 장흥 보림사. 2013년 1월 14일에 들런 보림사. 비로자나철불. 연도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사례이다. 9세기 중반 헌안왕 때 만든 것이다. 불상 왼쪽 어깨에 명문이 있다. 이 불상은 원래 상태가 나쁜 금도금이 되어 있다가, 문화재청의 보존처리로 금박을 벗겨내고 원래의 철불 모습에 가깝게 되돌린 것이다. 이때 철원 도피안사 비로자나불도 금박을 벗었다. 아래는 남원 실상사의 철제 여래좌상. 연대를 정확히 알 수없어서 대개 통일신라 후기로 추정한다. 그러나 시기가 조금 더 늦어질 가능성도 있다. 절 한켠의 발굴중인 장소에 설치한 가건물에 임시로 모셔져 있는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