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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전라도

익산 왕궁리 유적

  2014년 10월 17일.

  노랗게 색이 변한 나뭇잎들이 좀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몇 년만에 들런 왕궁리 유적. 이곳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오층석탑이다.

 

  그러나 느티나무 등의 잎은 이미 다 떨어졌고, 잔디만 녹색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였다.

  예전에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되며 어수선한 분위기일 때 와 본 것이 마지막이었던 듯. 이렇게 깔끔한 모습을 본 것은 거의 20년이 넘은 것같다.

 

  [새로 산 미러리스 시험하느라고 사진을 좀 크게 실었으니 클릭해서 보십사]

 

  이곳 주변에서는 발굴을 통하여 많은 것들이 확인되었다. 전각, 대형화장실, 공방 터와 정원 등이 확인되었는데, 그 중 화장실 터에서 나온 토양을 분석하여 기생충 알을 확인하기도 했다.

  기생충 알은 단순히 흥미거리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과 건강 환경을 파악할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일찍이 이 탑은, 백제의 전통을 잇고 있는 현지 사람들이 고려 초기에 세운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내가 대학생 때도 그렇게 배웠다. 선배로부터 "백제 땅에 있는 것이라고 해서 다 백제 것이 아니다"는 설명과 함께...

 

  그러나 이 탑의 조성연대는 논란거리이다. 1965년에 해체수리할 때 두 군데서 사리장치가 나왔는데, 목탑의 사리공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신라 말기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상과 청동방울이 나왔다.

 

  그런데 오층석탑 1층 지붕돌에 마련된 사리구멍에서는 청동 사리외함, 순금 사리내함과 순금 금강경판과 함께 유리 사리병이 나왔다.(아래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사진에서 가져온 것임)

 

 

  1965년 당시의 미술사학자들은 이들 유물을 통일신라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오층석탑도 통일신라 때의 것이라 추정하였는데. 수년전에 부여 왕흥사지를 비롯하여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 백제 당시의 사리 장엄구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새로운 문제제기가 나왔다.

  즉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구들도 백제 당시의 유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확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어렵지만, 대략 추리해본다면 이런 이야기가 가능할 듯하다.

  무왕이 익산 지역에 별도(別都)를 조성하면서 이곳에 궁궐을 지었고, 천도 계획이 실현되지 못하면서 방기된 상태가 되었다가 사찰이 들어섰다. 실제로 왕궁리 유적에서는 발굴을 통해 '궁사(宮寺)'라는 도장이 찍힌 기와가 나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목탑이 세워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중에 그 자리에 석탑을 다시 세우면서 백제 때의 사리장치를 그대로 수습하여 넣었다. 그리고 고려 초기에 언젠가 탑을 보수하면서 작은 불상을 추가로 넣은 것이 아닐까?....

  아뭏튼 앞으로 더 깊은 연구를 기다려볼 일이다.

 

  석탑의 뒷쪽에서 동남쪽을 보며 찍은 사진. 풀빛이 아직 남아 있어서 누런 색으로 온통 변한 때보다는 보기가 좋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이 익산 지역에 별도를 건설하려 한 곳으로 추정된다. 그런 추정은 발굴이 진행되면서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궁성(宮城)의 담장에 해당하는, 네모꼴로 둘러친 석축이 잘 다듬은 형태로 확인되었다. 두께와 높이는 궁장(宮墻)이라기보다는 좀 크고, 성벽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은 정도. 고고학계에서는 공식적으로 궁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래 사진은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아래 사진은 동쪽 벽을 내부에서 바라본 것. 물이 모였다가 성벽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한 시설이다.

  얼마 전, 이곳을 발굴한 중간 보고가 나왔다. 위 사진에서 트럭이 서 있는 곳 뒤쪽에서 옛날에 작은 하천이 흘러 지나가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보도.

 

  < 익산 왕궁리 유적 동쪽 외곽서 옛 하천 흔적 발견 > (연합, 13. 11. 21.)

 

  < 익산 왕궁리유적 발굴조사 성과 24일 공개 > (연합, 14. 11. 21.)

 

  <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백제 궁성 후원 전모 확인 > (연합, 2013. 11. 26.)

 

  왕궁리 오층석탑 주변을 발굴하던 당시의 사진을 연합 기사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