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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전라도

임실 진구사지 석등

  크기도 크려니와, 조각양식이 신라말 선종이 유행할 때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그래서 2007년에 우연히 한 번 들른 뒤로, 근방을 지날 때면 늘 들렀다 오는 것이 보통이다.

 

   예전에는 황량한 절터에 석등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몇 년 전에 발굴을 끝내고, 축대를 다시 쌓아두었다. 축대라고 해야, 소맷돌과 계단 일부만 원래의 석재들이 남아 있는 상태이고, 나머지 돌들은 새로 쌓은 것.

  발굴을 끝내고 주변을 정비했고, 고증을 통해 '진구사지(珍丘寺址)'라는 이름을 붙여두었다. 화장실을 세워두었고 주차장도 만들어놓았다. 예전에는 '임실 용암리 석등'이라 하던 것을 '임실 진구사지 석등'으로 문화재 명칭도 바꾸었다.

 

  아래는 화엄사에 갔다오다가 여름에 들렀을 때 사진.

 

   이런 모양으로 생긴 석등은 통일신라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지금 선종 사원이 있던 터, 또는 구례 화엄사라든가, 담양 개선사 터에 남아 있는 석등은 대개 이런 모양이다. 화려하고 크다. 

   상대석에 네모골로 파놓은 홈은, 아마 화사석(火舍石) 속의 등잔에 불을 붙이러 올라갈 때 이용하는 나무 사다리를 설치했던 흔적이 아닌가 짐작한다.

 

   아래는 2월에 아직 눈이 녹지 않았을 때 찍은 것. 여름에 찍은 것보다 보기가 좋다.

 

 

  이런 양식의 석등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8각 석등과 현저히 다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새로운 양식이 경주에서 시작해서 지방으로 확산되는 것이 아니고, 지방에서 출발해서 전국으로 펴저나간다는 것. 지금 남아 있는 것들로는 전라도에 여럿 있고, 강원도에도 있다. 그런데 이런 양식의 석등을 경상도에서는 찾기 어렵다.

  이런 사실이 무엇을 뜻할까?

 

  선종 사원의 존재와 관련될 것이고, 신라말의 지방사회 자체의 산물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그러나 온전히 지방의 산물일까? 그렇지는 않다. 개선사 석등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지방의 산물이긴 한데, 왕경의 기술과 재력이 어느 정도 개입되고 있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