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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답사기/풍경,유적

연천 경순왕릉

  15년 6월 27일(토).

  전날 비가 내려서 하늘이 흰구름과 함께 파랗고, 기온이 조금 높은 편이나 30도까지는 아니라서 다니기 좋은 편이었다.

 

  연천 경순왕릉. 신라 왕의 무덤들 중에서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난 능이다. 고려에 항복한 뒤에 개성에서 살다가 죽었으니 개성에서 가까운 곳에 묻힌 것이 어색하지는 않다. 그러나 원래 고향에 묻히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하면 조금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입구에서 군인들이 주민증을 검사하고 통과시켜주었었다. 무장공비 김신조 무리의 침투로라고 해서 그랬다. 그런데 이제 가보니, 초소는 사라지고, 대신에 왕릉 일대를 빙둘러싸고 철조망을 쳐놓았다.

  유적지인 만큼 출입을 자유롭게 하고 이렇게 외곽을 둘러가며 울타리를 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앞쪽에서 본 모습. 이날은 하늘에 구름이 아주 좋았다.

 

  올라가서 본 모습. 단촐한 석물들만 배열되어 있다.

 

  앞의 정자각에 있는 비는 마멸이 심해서 글자를 읽을 수 없다.

 

 

  봉분 바로 앞에 서 있는 능표(陵標)의 글자는 뚜렷하다. 군데군데 파인 홈은 총탄 자국이다. 한국전쟁 때인지, 무장공비 침투 때인지는 알 수 없다. 김신조 일당은 이 부근을 그대로 통과했을 것이므로, 아마 한국전쟁 때의 탄흔일 가능성이 더 클 듯.

 

  능표의 뒷면. 

 

  경순왕릉 주차장에 내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이 능표의 탁본 사진을 붙여두었다. 사진 찍는 내 모습이 반사되어 있기는 하지만, 일단 소개해두고.

 

  탁본을 읽어보면, 능표의 뒷면에 새겨진 글자는 다음과 같다.

 

  王新羅第五十六王後唐天成二年戊子代景哀王

  而立淸泰乙未遜國于高麗宋太平興國戊寅麗景

  宗三年四月四日薨諡敬順以王禮葬于長湍古府

  南八里癸坐之原

  至行純德英謨毅烈聖上二十三年丁卯月日改立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왕은 신라 제56대 왕이다. 後唐 天成 2년 무자(927)에 경애왕 다음에 즉위하여 淸泰 乙未(935)에 나라를 고려에 바쳤다, 宋 太平興國 戊寅(978) 고려 景宗 3년 4월 4일에 薨했다. 시호를 敬順이라 하고 長湍古府의 남쪽 8里 되는 북쪽 언덕(癸坐)에 王禮로써 장사지냈다.

  지행순덕영모의열(至行純德英謨毅烈) 성상(聖上) 23년 정묘(1747)에 고쳐 세움[改立]

 

 

  능표에는 착오가 보인다. 후당 천성 2년 즉 927년은 무자(戊子) 년이 아니라 정해(丁亥) 년이다.

  그리고 마지막 행의 二十三의  三자는 탁본에서는 五자처럼 보이지만, 약간 흘려쓴 三자를 그대로 새겨서 보이는 착시이다.1747년은 영조 23년 정묘년이기 때문이다.

 

  『영조실록』16년 윤6월 8일조를 보면, 좌의정 김재로, 우의정 송인명 등을 인솔하고 빈청(賓廳)에 모여 앉아서 존호(尊號)를 의논하여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대전(大殿), 즉 현 임금에게 올려진 존호가 <지행순덕영모의열>이었다.

 

  경순왕릉의 능표는 그로부터 7년 뒤에 새로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