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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곽/고대

영월 정양산성

   영월 정양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것이다. 예전에 일부에서는 고구려 성으로 생각하려는 경향도 있었으나, 지금은 신라 성으로 보는 것이 대세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현지에서는 '왕검성'으로도 불렀지만, 지금은 지명을 따서 정양산성이라 부른다. 이 근처에 고려시대에는 정양역이 있었다. 이곳이 오래된 교통로상에서 중요한 자리임을 가리킨다.

 

  2009년 4월 13일.

  전날 서울을 출발해서 밤늦게 영월읍내에서 하루를 묵다.

  여러 번 찾아온 적이 있었지만, 겨울이나 초봄에만 답사했기에 풀빛이 조금 감도는 사진을 얻고 싶었고, 또 최근 어떤 블로그를 보니 영월군에서 유적정비한다고 성벽 주변을 벌채한 것같길래 궁금하기도 하고.... 시간을 만들어서 들렀다.

 

  14일 아침을 영월역 앞에서 올갱이 해장국으로 먹고, 산성 아래 주차장으로 갔다.

  차를 대기가 바쁘게 '산불감시'하는 분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이 구역은 입산이 안된다"고 한다. 몇 번 입씨름을 하다가, "이 사람도 자기 직분에 충실하려 하는 입장"이라 생각하고, 가르쳐준 대로 영월국유림사무소에 전화를 했다. 여기도 요지부동이다. 산불이 하도 많이 나서 그렇단다. 이해 안되는 바도 아니다.

  결국, 영월시내로 들어와서 국유림관리사무소를 찾아 허가서를 받아들고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뺏긴 시간만 40분 가량이다.

 

  어쨌든 슬슬 등산을 시작하고보니, 3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길에다 계단을 설치한 곳이 많고, 또 푸석한 부식토 위에는 잔자갈을 깔아놓은 구간이 많다. 유적을 찾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이다. 이제는 제법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는, 등산객들도 스쳐지나갈 뿐이었는데, 최근 몇년간 성곽에 관심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여러 블로그에서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최근에 정비를 했다더니, 성벽에 다달았을 때 이런 모습이 보인다. 예전에는 울창한 숲이 가로막아서 거의 보이지 않던 것인데, 서북쪽 바깥 성벽이 무너진 곳이다. 주변의 잡목들을 다 베어냈기 때문에 드러나는 모습이다.

 

 

  무너진 성벽을 넘어서서 안으로 들어가면, 이런 평탄한 곳이 나온다.

  원래는 제법 큰 저수시설이 있었을 것이고, 창고와 건물들이 몇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여기에 창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막 새싹이 돋기 시작하는 나무와 풀빛이 좋다. 나는 이런 빛깔을 좋아한다. 그래서 유적 사진도 이렇게 봄에 찍은 것들을 가려서 쓸 때가 많다.

 

  예전에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돌면서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는 왼쪽으로 돌기로 했다. 성벽 주변의 나무를 베어내고, 성문 터 앞에는 번듯한 표지판을 세워놓았다(그런데 좀 비껴 세워놓으면 안되나? 꼭 이렇게 한 가운데 세워야 할까...). 현문식(懸門式) 성문이다. 성벽 밖에서 들어올 때는 사다리를 올라야 하고, 적과 대치할 때는 사다리를 걷어올리면 되는 것이다.

  조만간 지자체에서 일부 성벽만이라도 복원한다고 나설 것이 뻔하다. 그러기 전에 사진이라도 제대로 찍어두려고 했다.

 

  위의 성문 바깥 모습은 이렇다. 제법 잘 남아 있는 구간이다. 높은 곳은 7~8m 가량 된다.

  바깥에서 보면, 성문의 바닥 높이를 알 수 있다.

 

  동북쪽 성벽의 무너진 일부이다. 6m 가량 되는 높이로 절묘하게 이런 모습으로 남았다.

 

  조금 더 동쪽을 향해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이렇다. 삼년산성 못지 않게 성벽이 잘 남은 곳이 정양산성이다. 잔존한 최대 높이는 거의 10m를 넘지 않겠나 싶다.

  그나마 벌채를 해놓아서 비교적 수월하게 성벽 아래를 돌아볼 수 있었다. 예전에 잡목이 우거져 있을 때는 온통 다리를 긁혀가면서 힘겹게 비탈길을 헤집고 다녀야 했던 곳이다.

 

  남문이 있는 구간이다. 잡목들을 베어내고나니, 남쪽 성벽과 서북쪽 성벽이 만나는 곳까지 훤히 보인다. 아직 나뭇잎이 다 돋아나지 않아서 이 정도이고, 녹음이 우거지면 사진으로도 잘 안보일 것이다. 이 구간 성벽은 일부만 남아 있고, 거의 허물어졌다.

 

  바로 위의 사진을 찍고 내려오다가, 무너진 성벽 위에서 미끄러져서 약간의 부상을 입다. 카메라가 바위에 내동댕이쳐져서 깨졌다고 생각했는데, 멀쩡히 작동되는 것을 보고 안심... 방진방습이 안된다고 늘 욕했었는데, 제법 방충은 되나 보다.

  그래도 왼쪽 발목 근처 두어군데가 살짝 찢어져서 피 몇 방울을 흘리고, 오른쪽 무릎은 충격을 받아 며칠 째 쪼그려 앉기가 힘들다. 왼쪽 허리 뒤에도 멍이 꽤 들어서 움직이면 욱신거릴 정도... 이나마 다행이라 해야 하나.

 

  한 바퀴를 도는 데 거의 3시간 가량. 올라온 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내려오면서 바라본 강물. 남한강 상류이다. 영월읍에서 동강과 서강이 만나서 사진에 보이는 이 강물로 합쳐진다.

  이 강을 따라 내려가면 고씨동굴이 나오고, 다시 조금 더 내려가면 단양 온달산성, 그리고 단양 적성이 있다. 또 이 강 오른쪽 산으로 올라가면 태화산성이 있고, 고씨 동굴 가까운 곳에 대야산성이 있다. 나는 이 산성들의 대부분이 신라가 쌓은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렇게 악착같이 영토지배를 위한 산성을 쌓은 것은 고구려보다는 신라일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6세기 중반, 소백산맥을 넘어 진출한 신라는 새로 확보한 영토와 주민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다는 생각이다.

 

  거칠부가 죽령 이북을 공략했을 때, 과거 그가 승려로 떠돌면서 고구려 땅에서 만났던 혜량법사가 길가에 마중나와 있었다. 거칠부는 말에서 내려 군례(軍禮)로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혜량법사를 모시고 왕경으로 돌아온다. 나는 거칠부가 혜량법사를 만난 곳이 이곳 영월 부근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단양보다는 이곳이 더 합당할 것같다.

 

  정양산성을 오르는 길에는 정조의 태실비가 있다. '正宗大王胎室碑'라고 새겨져 있는데, 우리는 흔히 정조라고 부르지만, 죽은 뒤에 처음 받은 시호는 정종이었고, 나중에 더 높여서 바친 것이 '정조'이기 때문이다.

* 내 싸이 블로그의 글을 옮김

 

이후에 발굴이 진행되면서 드러난 사실들 :

 

< 도르레 이용한 신라 수리시설 최초 확인 > (연합, 11. 10. 20.)

 

< 정양산성 2차 발굴조사에서 건물지 등 확인 > (연합, 11. 10. 21.)

 

< 영월 정양산성서 통일신라시대 집수정 발견 > (연합, 12.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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