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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답사기/풍경,유적

삼국유사의 하서지촌, 나아

  경주에서 감은사지, 대왕암 쪽으로 가서.

  다시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하서항'이라는 작은 어항(魚港)이 있다. 행정구역으로 '하서리(下西里)'이다. 하서천이라는 개천이 서쪽 산에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남북쪽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여기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하서지촌이다.

  지도로 보면 이렇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6부의 하나인 한기부와 함께 상서지촌, 하서지촌, 내아가 나온다.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 始祖 赫居世王)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六村)이 있었다. ... 5는 금산 가리촌(金山 加里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 북쪽 산이다. ]이니, 마을 어른은 지타(祗沱)[ 只他라고도 쓴다. ]라고 하여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다. 이가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니 상·하서지(上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 『삼국유사』 기이(紀異) 신라 시조 혁거세왕 - 번역은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연이 살던 고려 후기에 한기부는 가덕부로 불리고 있었고, 동해안의 상하서지촌, 내아촌이 여기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지명이 유지되고 있는데, 내아=나아의 모습이다.

  위의 지도에는 숲으로 되어 있지만,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제법 큰 마을이 있었으나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옮겼다고 한다.

  내아는 현재 '나아'라는 발음의 지명으로 남아 전한다.

 

양남면 나아

 

양남면 하서항

 

  하서지촌은 석탈해와 관련된 기록에도 나온다.

 

  제4대 탈해왕(第四 脫解王)
  탈해치질금[ 한편 토해니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  남해왕(南解王) 때 [고본에 임인년(壬寅年)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오류이다. 가깝게는노례왕의 즉위 이후이므로 양위를 놓고 다투던 일이 없게 되며, 그 이전에는 혁거세의 재위기이므로 임인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락국의 바다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가락국에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배가 급히 나는 듯이 달려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 [지금도 상서지와 하서지촌명이 있다]에 이르렀다.
  당시 포구의 해변에 한 할멈이 있었으니 이름은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 때의 고기잡이[海尺]의 모(母)였다. [아진의선이] 배를 바라보며 말하기를 “본시 이 바다 가운데에 바위가 없는데 어찌해서 까치가 모여서 울고 있는가?” 하고 배를 끌어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로 모여들고 배 안에 상자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자이고 넓이는 13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두고 이것이 흉한 일인지 길한 일인지를 몰라 하늘을 향해 고하였다.
  잠시 후 궤를 열어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있고, 또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가 그 속에 가득하였다. 칠일 동안 잘 대접하였더니 이에 (사내아이가) 말하기를 “나는 본시 용성국 [한편 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는 혹 화하국(花廈國)이라고도 한다. 용성은 왜의 동북 일천리에 있다]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일찍이 이십팔 용왕이 있는데, 모두 다 사람의 태(胎)에서 태어나 5~6세 때부터 왕위에 올라 만민을 가르치고 정성(正性)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팔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지만 선택하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자식 구하기를 기도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이에 대왕이 군신들을 불러 모아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니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넣고 더불어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후, 바다에 띄워놓고 축언하여 이르기를, ‘인연이 있는 곳에 닿는 대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 『삼국유사』 기이(紀異) 탈해왕 - 번역은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이 기록에 나오는 하서지촌이 지금의 하서항이 있는 하서리 마을이다.

  일연이 경주에 머물 때 이곳을 둘러본 듯, "지금도 상서지촌, 하서지촌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지명이 끈질기게 남은 경우이다. 신라 때는 이곳 부근의 포구가 '아진포'라고 불리고 있다.

 

  그런데 정작 석탈해와 관련된 유적(?)은 하서가 아니라 '나아'에 있다.

  발전소 근방에 '석탈해왕 탄강유허'라고 이름붙인 작은 건물이 있다.

 

석탈해왕 탄강유허

 

  안에는 비석이 있고, 이 비석을 보호하는 작은 비각을 담장으로 둘러쌌다.

  비석과 비각은 1845년(헌종 11)에 세운 것이다. 경주를 비롯한 지방의 몇 유적들은 19세기 무렵에 세운 것들이 더러 있다. 경주 계림의 계림비각 안에 있는 비석도 1803년(순조 3)에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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