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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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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재발굴 때 나온 이사지왕 칼집 몇 년 전에 경주박물관에서 금관총 유물을 재정리, 보존처리하면서, 칼 손잡이에서 '이사지왕( 尒斯智王)'이라는 명문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아래는 내가 경주박물관에서 찍은 칼손잡이 사진. 위에서 비추는 조명이 반사되어 썩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글자를 알아볼 수는 있다.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읽을 수 있다. 올해 들어서 경주시와 문화재연구소에서 금관총 재발굴에 착수했는데. 그 중간 성과가 알려졌었다. 금관총 재발굴 중간 성과를 언급한 내 글 그런데 이번에는 재발굴하는 과정에서 칼집이 나온 모양이고, 이 칼집에서 다시 '이사지왕(尔斯智王)'이라는 명문이 확인된 모양이다. 이 무덤이 이사지왕의 무덤이라는 점이 분명해지는 셈이다. 다만, 이사지왕이 신라의 어느 왕인지는 아직 논란..
고려 시대 고선박 ‘대부도 2호선’ 발굴조사 [발굴작업 사진(문화재 배포)] 낙지 잡다가 발견한 고려시대의 소형 선박 발굴작업이 완료된 모양. 문화재청의 보도자료 - 안산 대부도 고려 시대 고선박‘대부도 2호선’발굴조사 완료 -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소장 소재구)는 지난 6월 착수한 안산 대부도 방아머리 해수욕장 인근 해역의 ‘대부도 2호선’ 발굴조사를 완료하였다. 대부도 2호선은 지난해 11월 대부도에서 낙지잡이를 하던 어민에 의해 발견 신고되었으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지난 1월 선박의 훼손방지를 위한 긴급보호조치와 현장조사 등을 시행한 바 있다. 고선박은 보통 침몰 지역명에 따라 명칭을 부여하며, 대부도에서는 지난 2006년 고려 선박이 발굴된 바 있어 이번에 조사된 선박은 대부도 2호선으로 이름을 붙였다. 방아머리 해수욕장 인근의 ..
몽촌토성의 백제 포장도로 풍남토성과 몽촌토성은 남과 북으로 마주하는 백제 왕성(王城)이다. 광개토왕릉비문에도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으로 나온다. 몽촌토성은 올림픽 공원으로 개발되기 전에 간단한 발굴을 거친 적이 있지만, 매우 거친 조사였다. 성 내부에 토사퇴적이 깊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백제시대의 주거지인 바닥면까지 철저히 발굴이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발굴 구역도 넓지 않았다. 풍납토성 발굴을 통해, 현재의 지표면에서 6m 이상 파내려간 곳에서 백제시대의 주거 흔적이 존재한다는 것이 알려졌고,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몽촌토성을 새로 발굴하고 있는데, 백제의 도로 흔적이 확인되었다. (jtbc, 15. 7. 10) < 1600년..
경주 금관총 재발굴 중간성과 일제강점기에 고분을 파헤치고 눈에 띄는 유물만 들어내는 방식으로 거칠게 발굴되었던 금관총. 금관이 최초로 출토한 탓에 금관총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고분. 이 고분을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재발굴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 그 중간 결과를 발표했는데,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의 축조과정을 알 수 있게 되었고. 또 일본인들이 놓친 유물들도 일부가 확인된 모양이다. 은으로 만든 허리띠, 유리그릇의 파편 등이 눈에 띈다. 물론 이 유물들은 일제가 발굴하면서 놓친 것들이고, 따라서 원래의 위치를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다만, 이런 것이 여기서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참고할 자료가 되는 셈. 아래 링크된 언론 기사들 중에서, 한겨레 노형석 기자의 두번 째 기사는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경주 돌무지덧널..
전주 오목대서 후백제 성벽 흔적 발굴 후백제 견훤은 무주(광주)에서 독립한 뒤에 남쪽 전주로 내려와서 왕조를 운영했다. 그런데 전주와 완주 부근에서 후백제의 도성을 확인하는 일은 별로 진척이 없었다. 여러 곳이 추정되었을 뿐, 비교적 가능성이 높은 곳을 찾기 어려웠는데, 이번에 한옥마을 뒷편에서 이와 관련된 유적이 발굴되었다. 물론 이곳이 후백제 도성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고, 발굴자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은 도성의 외곽을 방어하는 성벽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모양이다. 더 조사하여 결과를 기다릴 필요가 있을 듯. (연합, 15. 6. 11.)
풍납동식 한성백제 와당 용인 출토 백제 도읍지였던 풍납동에서만 발견되던 백제기와가 용인에서도 나온 모양. (연합, 15. 6. 2.)
경산 임당동 고분은 압독국 후예 흥미로운 발굴소식이 한겨레에만 실렸다. (한겨레, 15. 4. 27.) 나는 원효의 고향이 경산 쪽이라는 『삼국유사』기록을 놓고. 어쩌면 6세기에 아시촌 소경의 설치와 함께 왕경에서 지방으로 이주한 귀족들 - 6두품급 귀족들 -의 후예가 아니었을까 추정했었다. 그러나 이런 발굴소식을 접하면서. 어쩌면 원효 같은 경우가 원래 경산에 뿌리내리고 살던 가문이 6세기 이후 골품제 확립과 함께 6두품으로 편제되어 중앙에 와서 활동할 자격을 지니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만, 그렇게 생각할 때 여전히 걸리는 문제가. 이렇게 5세기까지만 해도 지방에서 잘 나가던 세력들을 6세기에 들면서 두품신분으로 편제한 다음에....
영암 자라봉고분 축조 비밀 발굴하여 드러난 양상을 판단할 때는 참으로 의아스런 경우가 있다. 영암 자라봉 고분, 즉 한국에 있는 전방후원분의 발굴 결과, 후원부를 먼저 다져 쌓고, 그 다음에 전방부를 만들고. 그리고나서 후원부의 봉토를 다시 파헤쳐서 석실을 만들고 시신을 안치했던 흔적을 확인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연합, 15. 4. 15.) 만약 발굴자들의 판단이 옳다면, 이는 일종의 수릉(壽陵) 즉 살아 있을 때 무덤을 미리 만들어놓고, 주인공이 죽으면 매장하는 방식이라 할 것이다. 중국의 진시황릉을 비롯한 많은 황제릉들은 이렇게 살아 있을 때부터 무덤을 축조한 경우이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회에는 고구려나 신라, 백제에서도 살았을 때 미리 무덤을 만든 경우는 없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