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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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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지금 복원의 ‘난장판’ 박근혜 정권 들어서, 문화재청이 새누리 경주시장과 함께 대대적인 발굴 정비 복원사업에 착수했는데. 비판적인 기사가 나온 것은 처음인 듯. (한겨레, 16. 1. 4.) 경주월성 발굴 현장 (한겨레 16. 1. 4. 사진)
울진 성류굴서 신라시대 금석문 발견 울진 성류굴 입구에서 위덕대 박물관이 삼국시대 명문을 새로 찾은 모양이다. 박흥국 선생이 부지런히 다니는 체질이니, 이번에도 그 부지런함이 빛을 보는 듯. 내용을 대략 보니, 6세기 중반이라고 생각되고, 발견자 역시 계해년(癸亥年)을 543년(진흥왕4)으로 판단한 듯. 내가 보아도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인다. 천전리서석의 분위기와도 비슷하고. 언제 누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적은 내용이 아닐까 생각된다. 울진에는 신라시대 금석문으로 [울진봉평신라비]가 있고. 이외에도 다른 금석문이 발견될 가능성, 특히 천전리서석처럼 바위에 새긴 글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나도 생각하고 있었다. 왕피천 계곡이 그 가능성이 클 것같아서, 언제 한 번 둘러보아야겠다고 생각했었고. 지형을 살피느라고 10여 년 전에는 차를 몰..
나주 철천리 석불입상과 마애칠불 2015년 10월 2일. 국립나주박물관의 작은 특별전을 둘러보고, 이번 기회에 한 번 둘러보자고 생각하던 나주 봉황면 철천리(鐵川里) 석불을 찾았다. 미륵사라는 작은 절 뒷산에 있는데. 이 절은 납골시설을 마련하여 운영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는 듯했다. 절 앞까지 차가 올라간다. 주차장에 차를 대면 보이는 절 입구. 절을 지나서 언덕 위로 올라가면 보이는 모습. 왼쪽의 보호 난간 속에 있는 것이 [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상]이다 보불 4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추꼴의 작은 바위를 돌아가며 불상을 새겼다. 얼핏 보아도 그리 우수한 조각수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윤곽을 부조(浮彫)로 파낸 뒤에, 불상의 몸 형체는 거의 선각(線刻)했다고 할 정도. 보물로 지정될 당시에는 조성시기를 대략 12~13세기 쯤으로 판..
광주서 천오백년전 대규모 마을유적 광주에서 대규모 마을 유적이 발굴된 모양이다. (연합, 15. 6. 9) 고상식(高床式) 건물은 주로 창고로 쓰이는 것인데. 이게 대량으로 확인된 것이 흥미로운 점. 그리고 일반 주거지 사이에 한두개씩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개인, 혹은 수장(首長)의 것일 수도 있고. 밀집해 있는 것은 집단의 저장시설일 수도 있을 듯. 자세한 것은 나중에 발굴보고서를 보아야 할 것.
천마총과 비슷한 의성 대리리 금귀고리 고급 장신구, 무기 등은 신라가 주변 지역의 우두머리들을 복속시키고 자신의 영향력 아래 묶어두는 매개물로 곧잘 사용된다. 금동관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번에 의성에서 천마총 출토품과 비슷한 금귀고리가 출토된 모양이다. 아래는 문화재청 보도자료 및 첨부파일.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의 허가를 받아 (재)성림문화재연구원(원장 박광열)이 발굴조사 중인 ‘의성 대리리 45호분’(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에서 경주 천마총 출토품과 유사한 금제 귀걸이가 출토되었다. 이번 조사는 문화재청이 (사)한국매장문화재협회(회장 조상기)에 위탁 추진 중인 비지정 매장문화재 학술조사사업의 하나이다. 의성 대리리 45호분 주변 탑리, 학미리 일대에는 ‘의성 금성산 고분군’(경상북도 기념물 제128호) 등 삼국시대 신라 고분군..
춘천 중도에서 고구려 귀고리 출토 춘천 중도의 레고랜드 예정부지에서는 많은 고인돌과 비파형동검까지 출토되더니, 이제는 석곽묘에서 고구려 귀걸이까지 출토한 모양이다. (연합, 15. 6. 3.) 아래의 한겨레 기사가 훨씬 친절함 (한겨레, 15. 6. 3)
김인문의 친필 필적 비록 글 내용을 쓴 것은 아니지만, 필체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듯. 중국 산시성(陝西省) 바오지(寶鷄) 시 톈타이 산(天台山)에 있는 비석에서 발견. 내가 보아도 탁본상 金仁은 워낙 분명하고. 마지막 글자인 問은 약간의 논란이 있겠지만 問으로 판독해도 별 무리가 없을 듯. 내가 판독하는 방법을 쓰면 금방 확인될텐데. (연합, 15. 6. 2.)
해인사의 법고 해인사는 몇 년만에 찾는 길이었다. 2015년 3월 27일.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할 무렵, 시간을 재촉하며 해인사로 올라갔다. 초파일이 되면 여기에도 등을 빼곡히 달아놓기 때문에, 이 사진을 찍으려면 그 전이나 가을에 와야 한다. 마침 이 날은 대적광전과 석등, 석탑을 제대로 담을 수 있었다. 대적광전 안의 비로자나불. 이 비로자나불과 좌우의 문수, 보현보살은 용계사(龍溪寺)에서 옮겨온 것이다. 나머지 보살들도 이웃 사찰에서 옮겨온 것이다. 대적광전 앞에서 탑과 석등을 내려다 본 모습. 내려오는 길에 마침 종루(鐘樓)에서 스님들이 법고 칠 준비를 하고 있길래 학생들과 함께 20여 분을 기다렸다. 그래서 법고를 치고, 종을 치는 소리를 잠시 영상으로 담을 수 있었다. 왼쪽 기둥의 주련(柱聯)에는 "원..